맨위로가기

1907년 공황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907년 공황은 미국에서 발생한 심각한 금융 위기로, 중앙은행 부재, 낙후된 금융 시스템, 외부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다. 1836년 미국 제2 은행 폐지 이후 중앙은행이 부재한 상황에서, 샌프란시스코 지진, 영국 은행의 금리 인상, 헵번 법 시행 등 일련의 사건들이 경제 불안을 심화시켰다. 특히 유나이티드 구리 회사 주식 사재기 실패로 촉발된 뱅크런은 니커보커 신탁회사를 시작으로 금융 시스템 전반으로 확산되었고, JP 모건의 개입과 정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뉴욕 증권거래소 폐쇄 위기를 겪었다. 이 위기는 미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금융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하여 연방준비제도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07년 미국 - 니커보커 신탁회사
    1884년 설립된 미국의 니커보커 신탁회사는 개인, 기업, 자산에 대한 수탁자 역할을 수행했으나, 1907년 회장의 투기 실패와 뱅크런으로 파산하며 1907년 공황을 촉발했고, 이후 재개장했지만 컬럼비아 신탁회사에 인수되어 현재는 뉴욕 은행의 일부가 되었다.
1907년 공황
지도
기본 정보
명칭1907년 공황
다른 명칭1907년 금융 공황
1907년 은행 공황
니커보커 위기
발생 시점1907년 10월
종료 시점1907년 11월
장소미국
원인
주요 원인니커보커 신탁 회사의 파산
뉴욕 증권 거래소의 급격한 하락
만연한 은행 및 신탁 회사에 대한 불신
주요 영향
경제적 영향뉴욕 증권 거래소의 급격한 하락
많은 은행 및 신탁 회사의 파산
수많은 기업과 개인의 파산
결과연방준비제도 설립에 대한 지지 증가
미 정부가 금융 시스템 감독을 위한 새로운 기구 설립
민간 은행들이 상호 협력을 강화
관련 인물
주요 인물존 피어폰트 모건
제임스 스틸먼
조지 F. 베이커
사건 전개
배경이전의 경제 호황으로 인해 과도한 투기 발생
은행 및 신탁 회사에 대한 규제 부재
위기의 시작1907년 10월, 니커보커 신탁 회사의 파산
은행 및 신탁 회사에 대한 신뢰 상실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의 뱅크런 발생
위기의 확산은행 간의 신뢰 부족으로 인해 은행 간 대출이 중단됨
증권 시장의 급격한 하락
신탁 회사와 은행의 줄도산
위기의 종결존 피어폰트 모건이 자금을 모아 위기를 진정시킴
은행과 신탁 회사에 자금을 공급하여 뱅크런을 막음
여파 및 평가
평가미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금융 위기 중 하나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을 드러냄
금융 시스템 개혁에 대한 요구 증가
이후연방준비제도 설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됨
금융 시스템의 감독을 위한 새로운 기구가 설립됨
연관 사건
관련 사건1873년 공황
1893년 공황
1929년 주식 시장 붕괴
대공황

2. 경제 상황

1900년대 초, 영국과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은 전쟁으로 인해 자본이 부족해지자 자본 확보를 위해 금리를 인상했고, 이로 인해 신흥 시장이었던 미국에서 자본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은 시장에 큰 타격을 주었고, 복구를 위해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대규모 자금이 유입되었다.[8][9] 1906년 말 영국은행의 금리 인상은 런던 자본 시장의 유동성을 감소시켜 미국으로의 자금 유입을 더욱 촉진했다.[10] 1906년 7월 시행된 헵번 법은 주간 상거래 위원회에 최대 철도 요금을 설정할 권한을 부여하여 철도 회사 주가 하락을 야기했다.[11][12]

1906년 9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주식 시장은 하락했고, 시가 총액은 7.7% 감소했다.[13] 3월 9일부터 26일까지 주가는 추가로 9.8% 하락했다.[14] 여름 내내 경제는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유니온 퍼시픽 철도 주식 하락, 뉴욕 채권 발행 실패, 구리 시장 폭락, 스탠더드오일 사에 대한 거액의 벌금 부과 등 시스템에 충격을 주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15] 1907년 9개월 만에 주가는 24.4% 하락했다.[16]

7월 27일자 미국 상업지 《더 커머셜 앤 파이낸셜 크로니클》은 당시의 시장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시장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 밝은 희망이 보이나 했더니 이번에는 파리에 금 유출 정보가 새롭게 전해져 모처럼 올라갔던 시황이 동요되고, 가치 상승도, 희망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17]

1907년 4월과 5월에는 이집트, 5월과 6월에는 일본, 10월 초에는 독일칠레에서 뱅크런이 발생했다.[11]

1906년 1월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103 달러의 최고치를 기록했다.[7]

1904~1910년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 1907년 11월 15일 최저치 53 기록

2. 1. 중앙은행 부재와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

1836년 당시 미국 대통령 앤드류 잭슨이 미합중국 제2 은행의 면허 갱신을 거부한 이후 미국은 중앙은행 부재 상태가 계속되었다.[7] 이 때문에 뉴욕의 화폐 공급량은 농업 주기의 자금 수요에 따라 불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금융 시스템은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매년 가을 수확기에 수확물 매입을 위해 회계 자금이 필요했고, 그 흐름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올렸지만, 미국 이외의 투자자는 반대로 이 금리 상승을 기다렸다가 자금을 뉴욕에 보내며 이자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1906년 4월 샌프란시스코 지진으로 샌프란시스코가 엄청난 피해를 입자 시장은 폭락했고,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다. 이를 복구하기 위해 과도한 자금이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흘러 들어갔다.[8][9] 1906년 말에는 영국은행이 지표 금리를 인상했다. 이는 영국의 보험회사가 미국의 보험 계약자에게 많은 보험금을 지불하기 위해 영국에서 미국으로 대량의 돈이 유입되어 런던 자본 시장의 유동성이 떨어져 영국에서 돈이 고갈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10]

1906년 7월에 시행된 헵번 법으로 주간 통상위원회에서 철도 운임을 결정할 권한이 부여되었고, 철도 회사의 주가는 하락했다.[11][12] 1907년이 시작된 지 9개월 만에 주가는 24.4%나 하락했다.[16] 1907년 여름 보스턴 시, 뉴욕 시 정부가 지방채권을 발행했으나 실패했다.

7월 27일자 미국 상업지 《더 커머셜 앤 파이낸셜 크로니클》은 당시의 시장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시장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 밝은 희망이 보이나 했더니 이번에는 파리에 금 유출 정보가 새롭게 전해져 모처럼 올라갔던 시황이 동요되고, 가치 상승도, 희망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17]

1907년 당시 미국과 세계는 금 본위제를 사용했는데, 급격한 산업과 사업의 생산성 향상 속도에 비해 전 세계의 금 생산량은 따라가지 못했다. 통화 공급이 금 본위제 때문에 잘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1907년 초에 발생한 보어 전쟁과 러일 전쟁은 서구 금융시장의 현금을 대거 소진했고, 서구 유럽 국가들의 중앙은행들은 경쟁적으로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신흥국이어서 많은 자본을 필요로 했는데 유럽 국가들이 금리를 올리니 미국에서 자본이 빠져나갔다.

당시 2만 1천개의 은행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금융 시스템의 생산성이 낮고 매우 낙후되었기 때문에 공동 보조를 맞추기 위한 협의 기구나 유동성 위기 대응을 위한 공동 지급 준비금 등의 위기 대응책이 없었다. 중앙은행도 없었기에 은행들에 뱅크런이 일어난다면 해결할 방법도 없었다. 1907년 공황의 주범이었던 신탁회사는 금융 시스템에서 가장 약한 고리였는데, 이 신탁회사들은 변변찮은 지급준비금으로 다양한 금융 활동을 했고 심지어 벤처 투자에도 많은 비율의 금융자산을 배분할 수 있었다. 신탁회사 관련 법적 규제가 아예 없었다. 이런 약한 금융 시스템 상황에서 뱅크런이 일어난다면 도미노처럼 대량으로, 매우 쉽게 파산하게 된다.

2. 2. 외부 요인

1907년 공황의 직접적인 원인은 유나이티드 코퍼라는 구리 광산 회사에 대한 주식 매입 작전 실패였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유럽에서 발생했다. 당시 미국과 세계는 금 본위제를 사용했는데, 급격한 산업 발전과 생산성 향상 속도에 비해 전 세계 금 생산량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통화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던 것이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으로 샌프란시스코가 엄청난 피해를 입자 시장이 요동쳤으며, 과도한 자금이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흘러 들어갔다.[8][9] 또한 1906년 말에는 영국은행이 지표 금리를 인상했다. 이는 영국의 보험회사들이 미국의 보험 계약자에게 많은 보험금을 지불하기 위한 조치였다.[10]

1907년 초, 보어 전쟁러일 전쟁은 서구 금융시장의 현금을 대거 소진시켰다. 유럽 국가들의 중앙은행들은 경쟁적으로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신흥국으로서 많은 자본이 필요했는데, 유럽 국가들이 금리를 올리면서 미국에서 자본이 빠져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07년 공황이라는 세계적인 금융 위기를 초래했다. 당시 미국에는 2만 1천 개의 은행이 있었지만, 금융 시스템은 낙후되어 위기 대응 능력이 부족했다. 중앙은행도 없었기 때문에 뱅크런이 발생하면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2. 3. 1907년 공황의 근본 원인

1900년대 초, 영국과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은 전쟁으로 인해 자본이 부족해지자 자본 확보를 위해 금리를 인상했다. 이로 인해 신흥 시장이었던 미국에서 자본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1907년 10월, '구리 왕'으로 불리던 F. 오거스터스 하인츠 등이 소유한 금융 기업과 관련된 '유나이티드 구리 회사' 주식을 이용한 차익 거래 시도가 공황의 계기가 되었다. 이들의 매집 실패와 손실이 알려지면서, 자금을 지원했던 은행들에 대한 예금 인출 사태가 발생, 3개 은행이 파산했다. 이 소란은 다른 은행과 신탁회사로 확산되었고, 특히 니커보커 신탁회사의 파산은 위기를 증폭시켰다.

1836년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미합중국 제2 은행의 면허 갱신을 거부한 이후, 미국은 중앙은행 없이 운영되어 금융 시스템이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뉴욕의 화폐 공급량은 농업 주기에 따라 불규칙하게 변동했고, 가을 수확기에는 자금 수요 증가로 금리가 상승했다. 외국 투자자들은 이 금리 상승을 이용하여 이자 소득을 올렸다.

1906년 4월 샌프란시스코 지진은 시장에 큰 타격을 주었고, 복구를 위해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대규모 자금이 유입되었다. 1906년 말 영국은행의 금리 인상은 런던 자본 시장의 유동성을 감소시켜 미국으로의 자금 유입을 더욱 촉진했다. 1906년 7월 시행된 〈헵번 법〉은 철도 회사 주가 하락을 야기했다. 1906년 9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주식 시장은 하락했고, 시가 총액은 7.7% 감소했다.

여름 내내 경제는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유니온 퍼시픽 철도 주식 하락, 뉴욕 채권 발행 실패, 구리 시장 폭락, 스탠더드오일 사에 대한 거액의 벌금 부과 등 시스템에 충격을 주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1907년 9개월 만에 주가는 24.4% 하락했다.

1907년 4월과 5월에는 이집트, 5월과 6월에는 일본, 10월 초에는 독일칠레에서 뱅크런이 발생했다.

1907년 금융위기는 여러 안좋은 사건들이 중첩되어 발생한 세계적인 금융위기였다. 당시 미국과 세계는 금 본위제를 사용했는데, 산업과 사업의 생산성 향상 속도에 비해 금 생산량이 따라가지 못해 통화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또한, 1907년 초 발생한 보어 전쟁과 러일 전쟁은 서구 금융시장의 현금을 소진시켰고, 유럽 국가들의 중앙은행들은 경쟁적으로 금리를 인상했다. 미국은 신흥국으로서 많은 자본이 필요했는데, 유럽 국가들의 금리 인상으로 인해 자본이 유출되었다.

당시 미국에는 2만 1천 개의 은행이 존재했지만, 금융 시스템의 생산성이 낮고 낙후되어 위기 대응책이 없었다. 중앙은행도 없었기 때문에 뱅크런 발생 시 해결 방법이 없었다. 신탁회사는 금융 시스템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였는데, 법적 규제 없이 과도한 투자를 진행하여 뱅크런 발생 시 쉽게 파산할 수 있었다.

1905년, J.P.모건(J.P. Morgan)은 드레스덴 은행(Dresdner Bank)과 외화거래 계약을 체결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 전역의 자금이 독일 제국(German Empire)으로 유입되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자금 집중은 그 다음 해부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1906년의 암스트롱법(Armstrong Act)이 자금 모집에 기여했다. 대형 생명보험(Life Insurance) 회사들이 보유한 주식이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 그리고 쿤 로브(Kuhn, Loeb & Co.)에 매각되었다. 이 주식에는 신탁회사 주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이들 금융자본이 보유한 철도 채권이 이제 그들의 실질적인 자회사가 된 대형 생명보험회사에 매각되었다. 주식과 채권의 매도 압력은 시장을 긴장시켰다. 한편, 생명보험회사는 1906년 법률에 의해 증권 인수 업무가 금지되었다. 증권 투자를 원할 경우 금융 자본가들의 증권을 구매했는데, 이는 금융 자본가들이 자회사인 생명보험회사에 "매수 작전"을 지시한 것이었다. 이 그림자 금융 시스템(Shadow Banking System)이 독일로의 자금 공급에 기여한 것이다. 생명보험회사가 다른 수익을 낼 방법이라고는 모기지(Mortgage) 대출밖에 없었다. 생명보험회사의 비농지 모기지 대출은 당연히 장기 계약이 되었다. 금융 자본가들의 독일 투자와 생명보험회사의 모기지 대출은 외견상 단기 자금이었지만, 자금은 각 지역의 개발, 특히 전력화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계약은 갱신되었고 자금의 유동성은 상실되었다.

3. 위기

1900년대 초, 유럽 국가들은 전쟁으로 인해 자본이 부족해지자 금리를 인상하여 자본을 확보하려 했다. 이로 인해 신흥 시장이었던 미국에서 자본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7년 10월, 몬태나주의 "구리 왕" (Copper King)이라 불리던 F. 오거스터스 하인츠는 자신이 소유한 금융 기업들과 관련이 있어 시세 조작이 가능한 '유나이티드 구리 회사'(''United Copper Company'')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였다가 즉시 매도하여 차익을 얻으려 했다.

첫 번째 시도는 성공적이었으나, 두 번째 시도에서 하인츠 형제의 주식 매집은 실패로 끝났다. 이로 인한 손실이 알려지면서 하인츠 팀에게 자금을 지원했던 은행들이 대출 손실을 입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상업국립은행'을 비롯한 2개의 투자은행, 1개의 상업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고, 이 3개 은행들은 파산했다.

이러한 예금 인출 사태는 다른 은행과 신탁회사로 확산되었다. 하인츠 팀에게 직접 자금을 지원했던 3개 은행을 제외하면 다른 은행들의 실제 손실은 미미했지만, 이러한 손실 소식이 빠르게 퍼지면서 앞선 3개 은행에서 갑작스럽고 대규모의 뱅크런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판단력을 잃고 자금 지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거나 적었던 은행과 신탁회사에서도 대규모로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파산한 3개 은행과 금융 자산 규모가 비슷한 '니커보커 신탁회사'(''Knickerbocker Trust Company'')를 중심으로 예금을 인출했다. 이 기업이 갑작스러운 대규모 예금 인출로 인해 파산하고 영업이 정지되면서 위기는 본격적으로 증폭되었다. 니커보커 신탁회사의 도산과 관련 금융기업에서의 뱅크런에 불안을 느낀 예금자들은 모두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하려 했다. 지방 은행은 시중 은행에서, 전국의 시중 은행은 뉴욕 은행에서 예금의 회수를 시도했다.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대부분의 은행에서 지급을 제한하였고, 많은 은행들이 준비금 고갈로 파산했다.

당대 최고의 금융 자본가였던 JP 모건(존 피어폰트 모건)은 위기가 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뉴욕의 은행, 신탁회사를 설득해 구제금융 신디케이트를 만들었다. 그는 금융자산의 질이 좋으나 당장의 유동성만 없는 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금융자산의 질이 좋지 않아 자금을 지원해도 파산할 수밖에 없는 기업은 놔두는 식으로 기업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파산의 연쇄고리를 끊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미국은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할 중앙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모건이 그 역할을 한 형태가 되었다.

많은 금융기업과 신탁회사의 파산과 구제 뒤, 잠시 파산 숫자가 줄어들어 한동안 위기가 드러나지 않았으나 11월 초에 새로운 문제가 불거졌다. 대형 증권사 무어 앤 슐레이(''Moore & Schley'')가 ‘테네시 석탄 철강 철도 회사’(''Tennessee Coal, Iron and Railroad Company'', 이하 TC & I)의 주식을 담보로 3000만달러가 넘는 대규모 대출을 받았던 사실이 밝혀졌다. 불안정한 시장의 여파로 TC & I 사의 주가가 폭락하면서 담보 가치가 하락했고, 금융 기업에 대한 뱅크런 등으로 유동성이 부족했던 시기에 대규모 마진콜을 당하면서 시장은 새로운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JP모건이 주도하여 설립한 철강기업 US 스틸 사의 TC & I 인수로 급한 불을 끄게 되었다. 또한 당시 독점 자본을 배척해온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매우 급한 상황이었기에 인수를 묵인했다. 그 이후로 경제는 다시 회복되고 성장을 이어갔다.

3. 1. 유나이티드 구리 회사 주식 사재기

1900년대 초, 유럽 국가(영국, 독일)들이 전쟁으로 인해 자본이 부족해지자 금리를 인상하여 자본을 확보하려 했다. 이로 인해 신흥 시장이었던 미국에서 자본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7년 10월, 몬태나주의 "구리 왕" (Copper King)이라 불리던 F. 오거스터스 하인츠는 자신이 소유한 금융 기업들과 관련이 있어 시세 조작이 가능한 '유나이티드 구리 회사'(''United Copper Company'')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였다가 즉시 매도하여 차익을 얻으려 했다.

뉴욕증권거래소의 장외 거래소. 위기는 이러한 장외 거래를 통해 발생했다. 이 장외 거래소는 이후 미국증권거래소가 되었다.


하인츠는 유나이티드 구리 회사 주식의 대부분을 자신들 하인츠 형제가 보유했다고 믿고, 하인츠 형제 측이 적극적으로 주식을 매입하여 주식의 대부분을 정말 소유함으로써 공매도를 하는 쪽이 유나이티드 구리 회사의 주식을 매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 하인츠 측이 대다수의 주식을 사재기하면 주식의 반환을 요구하는 공매도 측은 주식을 고가로 매입하거나 하인츠 형제의 호가로 직접 청산할 수밖에 없으며 형제는 큰 차익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174]

첫 번째 시도는 성공적이었으나, 두 번째 시도에서 하인츠 형제의 주식 매집은 실패로 끝났다. 이로 인한 손실이 알려지면서 하인츠 팀에게 자금을 지원했던 은행들이 대출 손실을 입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상업국립은행'을 비롯한 2개의 투자은행, 1개의 상업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고, 이 3개 은행들은 파산했다.

이러한 예금 인출 사태는 다른 은행과 신탁회사로 확산되었다. 하인츠 팀에게 직접 자금을 지원했던 3개 은행을 제외하면 다른 은행들의 실제 손실은 미미했지만, 이러한 손실 소식이 빠르게 퍼지면서 앞선 3개 은행에서 갑작스럽고 대규모의 뱅크런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판단력을 잃고 자금 지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거나 적었던 은행과 신탁회사에서도 대규모로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파산한 3개 은행과 금융 자산 규모가 비슷한 '니커보커 신탁회사'(''Knickerbocker Trust Company'')를 중심으로 예금을 인출했다. 이 기업이 갑작스러운 대규모 예금 인출로 인해 파산하고 영업이 정지되면서 위기는 본격적으로 증폭되었다.

뉴욕에서 공황의 과정[173]
10월 14일 (월)오토 하인츠의 유나이티드 구리 회사 주식 사재기 시작
10월 16일 (수)하인츠의 매점은 실패하고, 하인츠를 중개한 그로스 클리버그 사가 영업 정지를 당함
10월 17일 (목)증권거래소는 오토 하인츠의 회사가 채무불이행으로 거래소 회원 자격을 정지. 오거스터스 하인츠 소유의 버트 몬태나주 저축은행이 파선을 선고. 아우거스터스 하인츠는 국립상업은행을 사임하고, 오거스터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찰스 모스의 은행 예금자가 뱅크런을 시작
10월 20일 (일)뉴욕 자금 결제기구는 뉴욕 시내의 모든 은행에 대해 오거스터스 하인츠와 찰스 모스는 은행업계에서 배제하도록 명령한다.
10월 21일 (월)찰스 T. 바니와 모스-하인츠 연합과의 관련이 분명해 보이는 바니는 니커보커 신탁회사를 사임했다. 국립상업은행과 니커보커 신탁회사의 결제 업무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10월 22일 (화)니커보커 신탁회사에서 뱅크런이 발생하고, 영업 정지에 몰림
10월 23일 (수)JP 모건이 신탁회사 사장들을 설득하여, 미국신탁회사에 투자하여 파탄은 피함
10월 24일 (목)재무장관 조지 코텔유가 뉴욕 시내의 제반 은행에 연방 예산 예치를 동의한다. 모건은 각 은행장들을 모아 설득 14개에 23600000USD를 출연하고, 뉴욕 증권거래소 폐쇄를 피함
10월 25일 (금)모건은 다시 증권거래소 지원을 위한 자금 풀을 구축하여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고, 증권거래소는 위기를 회피.
10월 27일 (일)뉴욕시 직원이 모건의 심복 조지 퍼킨스는 11월 1일까지 2000만달러에서 3000만달러를 확보하지 않으면 도시는 파산한다고 전한다.
10월 29일 (화)모건은 시 채권 3000만달러를 맡는다. 뉴욕시의 파산은 이에 따라 피할 수 있었다
11월 2일 (토)테네시 석탄 철강 철도 회사 (TC & I) 주식을 담보로 거액의 대출을 하고 있던 무어 앤 슬라이 증권사가 시장의 혼란에 의한 TC & I 주식의 하락 우려로 파산 직전에 몰림. 위기 회피를 위해, US 스틸이 TC & I 주식을 인수하는 방안이 제시된다.
11월 3일 (일)US 스틸의 재무위원회가 결국 TC & I의 인수 제안에 동의
11월 4일 (월)반독점으로 간주될 우려에도 루즈벨트 대통령은 US 스틸이 TC & I 주식을 착수하는 것을 묵인.
11월 5일 (화)대통령 선거 투표를 위해 시장이 휴무.
11월 6일 (수)US 스틸은 TC & I 주식의 인수 절차를 완료. 시장 회복, 신탁회사에 뱅크런도 잠잠해졌다


3. 2. 뱅크런 발생과 확산

1900년대 초, 유럽 국가들은 전쟁으로 인해 자본이 부족해지자 자본 확보를 위해 금리를 인상했다. 이로 인해 신흥 시장이었던 미국에서 자본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7년 10월, '구리왕'으로 불리던 F. 오거스터스 하인츠는 자신이 소유한 금융 기업과 관련된 '유나이티드 구리 회사'의 주식을 대량 매수 후 매도하여 차익을 얻으려 했다.

첫 번째 시도는 성공했지만, 두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로 인해 하인츠에게 자금을 지원했던 은행들이 손실을 입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상업국립은행'을 비롯한 3개의 금융기관에서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뱅크런)가 발생했고, 이 은행들은 파산했다.

이 소식은 다른 은행과 신탁회사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사람들은 하인츠에게 직접 자금을 지원했던 3개 은행 외에도, 금융 자산 규모가 비슷한 니커보커 신탁회사를 중심으로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니커보커 신탁회사가 대규모 예금 인출로 인해 영업을 정지하면서 위기가 본격적으로 증폭되었다.

니커보커 신탁회사의 도산과 관련 금융 기업에서의 뱅크런에 불안을 느낀 예금자들은 모든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하려 했다. 지방 은행은 시중 은행에서, 전국의 시중 은행은 뉴욕 은행에서 예금을 회수하려 했다.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대부분의 은행에서 지급을 제한했고, 많은 은행들이 준비금 고갈로 파산했다.

다음은 뉴욕에서 발생한 공황의 과정을 정리한 표이다.

날짜사건
10월 14일 (월)오토 하인츠가 유나이티드 구리 회사 주식 매집 시작
10월 16일 (수)하인츠의 매집 실패, 그로스 클리버그 사 영업 정지
10월 17일 (목)증권거래소는 오토 하인츠 회사의 거래소 회원 자격을 정지. 어거스터스 하인츠 소유의 버트 몬태나주 저축은행 파산 선고. 어거스터스 하인츠는 국립상업은행 사임. 찰스 모스의 은행 예금자 뱅크런 시작
10월 20일 (일)뉴욕 자금 결제기구는 뉴욕 시내의 모든 은행에 대해 오거스터스 하인츠와 찰스 모스를 은행업계에서 배제하도록 명령.
10월 21일 (월)찰스 T. 바니는 니커보커 신탁회사를 사임. 국립상업은행과 니커보커 신탁회사의 결제 업무를 실시한다고 발표.
10월 22일 (화)니커보커 신탁회사에서 뱅크런 발생, 영업 정지[181]
10월 23일 (수)JP 모건이 신탁회사 사장들을 설득하여, 미국신탁회사에 투자하여 파탄은 피함
10월 24일 (목)재무장관 조지 코텔유가 뉴욕 시내의 제반 은행에 연방 예산 예치를 동의. 모건은 각 은행장들을 모아 설득 14개에 23600000USD를 출연하고, 뉴욕 증권거래소 폐쇄를 피함
10월 25일 (금)모건은 다시 증권거래소 지원을 위한 자금 풀을 구축하여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고, 증권거래소는 위기를 회피.
10월 27일 (일)
뉴욕시 직원이 모건의 심복 조지 퍼킨스는 11월 1일까지 20000000USD에서 30000000USD를 확보하지 않으면 도시는 파산한다고 전한다.
10월 29일 (화)
모건은 시 채권 30000000USD를 맡는다. 뉴욕시의 파산은 이에 따라 피할 수 있었다
11월 2일 (토)
테네시 석탄 철강 철도 회사 (TC & I) 주식을 담보로 거액의 대출을 하고 있던 무어 앤 슬라이 증권사가 시장의 혼란에 의한 TC & I 주식의 하락 우려로 파산 직전에 몰림. 위기 회피를 위해, US 스틸이 TC & I 주식을 인수하는 방안이 제시된다.
11월 3일 (일)
US 스틸의 재무위원회가 결국 TC & I의 인수 제안에 동의
11월 4일 (월)
반독점으로 간주될 우려에도 루즈벨트 대통령은 US 스틸이 TC & I 주식을 착수하는 것을 묵인.
11월 5일 (화)
대통령 선거 투표를 위해 시장이 휴무.
11월 6일 (수)
US 스틸은 TC & I 주식의 인수 절차를 완료. 시장 회복, 신탁회사에 뱅크런도 잠잠해졌다


3. 3. JP 모건의 개입

당대 최고의 금융 자본가였던 JP 모건(존 피어폰트 모건)은 위기가 심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JP 모건은 신탁회사 회장들을 전부 불러모아 신디케이트 자본을 모아서 유동성을 확보하고 금융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금융자산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뉴욕의 은행, 신탁회사를 설득해 구제금융 신디케이트를 만들었다. 그는 자금을 지원하면 살 수 있는 기업, 즉 금융자산의 질이 좋으나 당장의 유동성만 없는 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금융자산의 질이 좋지 않은 기업이어서 자금을 지원해도 파산할 수밖에 없는 기업은 놔두는 식으로 기업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파산의 연쇄고리를 끊기 위해 노력했다. (니커보커 신탁회사는 자금을 지원해도 금융자산의 질이 좋지 않아 살 수 없는 기업에 해당되어 놔뒀다.) 당시 미국은 시장에 유동성을 주기 위한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건이 그 역할을 한 형태가 되었다.[182][183]

J. P. 모건, 뉴욕 시의 유력한 은행가로 1893년 공황미국 재무부를 위기에서 구했다.


혼돈이 뉴욕의 은행 간 신뢰 관계를 흔들기 시작했을 무렵, 월가에서 가장 유명한 은행가는 시외에 있었다. JP 모건은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 있는 교회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 모건은 당시 뉴욕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넓은 인맥을 가진 은행가였지만, 1893년 금융 위기 때 미국 재무부를 구한 실적을 이미 가지고 있던 인물이기도 했었다. 위기의 정보가 취합되자, 모건은 10월 19일 토요일 심야에 월스트리트로 복귀했다. 다음날, 36번가와 매디슨 가가 교차하는 곳에 있는 통칭 ‘모건 라이브러리’에는 정보를 공유하려고(혹은 구원을 찾으려고) 뉴욕 각 은행장, 신탁 회사 사장들이 하루 종일 방문하였고 모건은 하루 종일 사태 파악에 노력했다.

모건은 니커보커 신탁회사의 장부를 조사했고, 파산을 불가피한 것으로 결정하고 뱅크런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니커보커 파산의 영향이 다른 건전한 신탁회사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러한 건전한 금융 기관의 구제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10월 22일 화요일, 미국 신탁회사 사장이 모건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그날 저녁 조지 F. 베이커(퍼스트 내셔널 은행장), 제임스 스틸먼(내셔널 시티 은행장), 미국 재무무 장관 조지 코텔류가 모건과 회담을 했다. 코텔류는 예치금을 보강하는 것을 돕기 위해 국고금을 은행에 예탁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벙커 신탁 회사의 업무 책임자였던 벤자민 스트롱 등에게 수요일 낮까지 미국 신탁 회사를 감사하도록 지시했다. 10월 23일 수요일 오후 밤샘 감사를 마친 스트롱은 “미국 신탁 회사에 충분한 지불 능력이 있다”는 결론을 모건, 스틸맨, 베이커에게 전달했다. 모건은 스트롱에게 “미국 신탁회사를 구제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 하느냐”고 물었고, 스트롱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자 모건은 “그럼 문제는 이것으로 끝났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84]

미국 신탁회사에 소란이 시작되자 모건은 스틸먼과 베이커와 협력하여, 회사 자산의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예금을 인출하려는 공탁자에게 지불할 만큼의 자금을 공급했다. 영업시간을 무사히 나서 은행은 살아남았지만, 모건은 다음날도 견뎌내기 위해서는 자금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밤 다른 신탁회사 사장들을 소집해 자정까지 설득해가며 825만 달러를 확보했다.[185] 10월 24일 목요일 아침 코텔류 장관은 새로 2500만 달러를 뉴욕의 여러 은행에 예치했다고 발표했다.[186] 또한 미국 최고의 백만장자 존 D. 록펠러도 1000만 달러를 스틸먼의 내셔널 시티 은행에 예금했다.[186] 록펠러는 AP 통신의 책임자 멜빌 스톤에 전화로 “이 예금은 시민에게 신뢰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며, 미국의 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자산의 절반을 담보로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187]

뉴욕증권거래소 장(''1908년 사진'')


10월 24일 미 재무부와 록펠러의 자금 공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은행과 신탁회사는 마지못해 일반적으로 주식거래를 촉진시키기 위해 제공하는 단기자금을 융통했다. 이런 기금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목요일 낮에는 주가 폭락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10월 24일 목요일 오후 1시 30분 뉴욕증권거래소 회장의 랜섬 토마스는 모건의 사무실로 뛰어 “증권 거래소를 빨리 닫아야한다”고 말했지만 모건은 거래소를 평소보다 빨리 닫으면 시장은 오히려 혼란에 빠지게 된다고 강조했다.[188][189]

모건은 뉴욕 각 은행장들을 그의 사무실로 오도록 요청했다. 은행장들은 오후 2시가 지나서 도착하기 시작했고, 모건은 사무실에 모인 은행장들에게 10분 이내에 2500만 달러를 준비하지 않으면 적어도 50개의 증권사가 영업정지를 당할 것이라고 알렸다. 이에 따라 2시 16분까지 14개 은행장이 거래소 폐쇄를 피하기 위해 총 2,360만 달러를 마련했다. 현금은 2시 30분에 거래소로 옮겨졌고, 30분 후 3시 정각 거래소가 마감할 때까지 1900만 달러가 대출되고 있었다. 이 자금 풀을 통해 거래소 폐쇄의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 평소 모건은 언론을 기피하고 있었지만, 그날 밤 사무실을 떠날 때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사람들이 은행에 돈을 맡겨도, 모든 것이 괜찮을 겁니다.”[190]

10월 25일 금요일에도 거래소는 “다음은 그 회사가 위험하다” 등의 소문이 난무하였고, 시장의 현금은 고갈되고 있었다. 모건은 다시 주요 은행장들과 회동을 갖고, 두 번째 자금 풀 구축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때 각 은행들 모두 기여를 약간 기피하였고, 결국 모인 자금은 970만 달러에 불과했다. 모건은 이 자금의 지출 조건으로 이 자금은 마진 콜(신용 판매)에는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금요일 거래소 전체 거래량은 목요일의 2/3 정도였지만, 모건이 만든 자금 풀로 자금 수요는 충족되면서, 파산하는 증권사 없이 간신히 마감을 할 수 있었다.[191]

모건, 스틸먼, 베이커 그리고 시내 다른 은행장들이 자금 풀을 무한정 마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심지어 미국 재무부조차도 자금 제공자로서 충분하지 못했다. 은행가들은 일반 대중의 신뢰 회복이 필수적이며, 신뢰가 회복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2개의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하나는 성직자에 협조를 요청하기 위한 위원회로 이것은 일요일 예배에서 사람들을 진정 메시지를 전하도록 교회에 건의하도록 활동하는 조직이며, 두 번째 위원회는 홍보위원회로 구제 금융 지원을 언론에 설명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10월 26일) 토요일, 홍보위원회의 활동에 따라 일부 조간신문에서는 모건들의 노력을 기리는 시간벌기 기사가 지면에 게재되었다. 또한 당시 유럽에서 가장 저명한 은행가였던 로스차일드 경도 모건에 대해 ‘흠모와 존경’하는 마음을 전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192] 신뢰를 회복하려는 시도로, 재무부 장관 코텔류는 워싱턴으로 복귀하면 최악의 상황은 지나갔다는 메시지를 월스트리트에 보내겠다고 동의했다.[193][194]

월요일 자금의 유동성을 보장하기 위해, 뉴욕 자금 결제기구(New York Clearing House)는 은행간 현금을 해결하는데 교환할 수 있는 1억 달러의 대출 증서를 발행하여, 예금자들에 대한 현금 유보금을 보류할 수 있게 허용하였다.[195] 이러한 것을 성직자들과 신문에서 홍보를 했으며, 현금으로 인한 은행 잔고의 방출로 그 월요일에 뉴욕에 질서가 잡혔다.[196]

월스트리트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10월 27일 일요일 저녁 모건의 파트너 조지 퍼킨스는 11월 1일까지 적어도 2000만 달러의 자금을 준비하지 않으면, 파산할 것이라는 말을 뉴욕시에 알렸다. 시는 채권을 발행해 자금 조달하려 했지만 위기를 피하기에 충분한 금액을 모을 수 없었다. 10월 28일 월요일부터 다음 날 화요일에 걸쳐 시장, 시 간부들과 회의를 가진 J. P. 모건은 3000만 달러 상당의 시 발행 채권을 매입하여 파산이라는 ‘참극’에서 뉴욕시를 구했다.[197][194]

힘겹게 안정을 되찾은 뉴욕이었지만 또 다른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11월 2일 토요일, 모건과 일행들은 시장 최대 증권사 중 하나인 ‘무어 앤 슬라이’ 증권사(''Moore & Schley'')가 ‘테네시 석탄 철강 철도 회사’(''Tennessee Coal, Iron and Railroad Company'', 이하 TC & I)의 주식을 담보로 거액의 부채를 안고 파산 직전인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시장의 혼란에 의해 C & I 주식도 하락 우려가 생기고 있어서 주초에는 많은 은행이 무어 앤 슬라이에 대한 대출 회수에 나설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TC & I 주식은 급락하고, 무어 앤 슬라이가 파산하여 시장에 새로운 공황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198]

무어 앤 슬라이의 파산을 막기 위해 모건은 토요일 아침에 라이브러리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에서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의 회사와 앨버트 게리 등의 철강 회사와 합병하여 설립될 수 있도록 모건이 도움을 주었던 US 스틸이 TC & I 주식을 취득하는 제안이 이루어졌다. 이 방안이 현실화되면 무어 앤 슐레이는 사실상 효과적으로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US 스틸의 이사회는 위기 상황에서 해야 할 역할을 인식하고 TC & I 보통주를 담보로 500만 달러를 대출해 주거나, 한 주당 $90에 주식을 취득하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그날 오후 7시에 회의는 일단 휴회되었다.[199]

같은 무렵, JP 모건은 또 다른 난제를 안고 있었다. ‘미국신탁회사’(''Trust Company of America'')와 ‘링컨신탁회사’(''Lincoln Trust'')에서 뱅크런이 계속되고 있어 이대로 가다가는 조만간 파산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토요일 밤 40명에서 50명의 은행가가 위기 대응을 협의하기 위해 모건의 서재에 모였다. 자금결제기구는 서재의 동쪽 방에, 신탁회사, 은행 간부들에게는 서쪽 방이 배정되었다. 모건과 무어 앤 슬라이 건을 처리하는 것은 서재로 옮겨졌다. 모건은 “무어 앤 슬라이 구제”와 두 신탁회사의 구제를 동시에 할 것이 아니라, 신탁회사의 문제는 같은 업종 신탁회사들에게 맡기자고 말했다. 모건은 서재에서 신탁 회사가 그들의 가장 약한 형제를 구제할 생각이 있다면 무어 앤 슬라이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다.[200] 은행 간부들의 협의는 토요일 밤 늦게까지 이어졌지만 아무런 진전도 보이지 않았다. 자정 무렵, 모건은 신탁회사 사장들에게 “무어 앤 슬라이 구제를 위해 2500만 달러가 필요하다. 따라서 신탁회사 간에 이 문제가 해결가능하다고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면, 구제를 진행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는 향후 신탁회사는 모건에서 지원을 받을 수 없으며, 자체적으로 자구책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오전 3시에, 약 120명의 은행과 신탁 회사 간부가 모건의 서재에 모여 벤자민 스트롱에게 파산할 것 같은 신탁회사의 재무 상황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미국신탁회사는 간신히 예금자에게 환불을 해 줄 수 있지만, 링컨신탁회사의 자산은 예금자에게 환불을 하려면 100만 달러가량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은행가들을 모건이 그들을 서재에 가두고, 해결책을 강제하기 위해 열쇠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음 깨닫게 된다.[201] 이것은 과거 모건이 사용했다고 알려진 실력행사의 방책이었다.[202] 직후 모건은 회의에 들어가서, 신탁회사에 2500만 달러를 대출해서 약한 회사를 구하도록 조언했다. 신탁회사 사장들은 여전히 마뜩찮아 했지만, 모건은 그렇지 않으면 은행 금융 시스템 전체가 붕괴가 될 것이라고 알렸다. 오전 4시 45분 모건은 우선 유니온 신탁 회사의 사장 에드워드 킹에게 약정서에 서명하게 했고, 나머지 은행장들도 그 조치를 따랐다.[202] 따라서 상황은 해결되었고, 모건은 은행가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203]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월스트리트를 공격하는 만화


일요일 오후부터 저녁에 걸쳐 모건, 퍼킨스, 베이커 스틸먼 외에도 US 스틸의 앨버트 게리와 헨리 클레이 프릭이 모여, US 스틸과 TC & I 주식 거래에 대해 협의를 했다. 일요일 밤, US 스틸의 인수 계획이 결정되었지만, 한 가지 장애물이 남았다. 반독점주의자로 알려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 거래를 허용할지 여부였다.[204]

헨리 클레이 프릭과 앨버트 게리는 밤을 새워 기차를 타로 뉴욕에서 워싱턴 D.C.백악관까지 루즈벨트를 설득하기 위해 특별 열차를 타고 갔다. 월요일 새벽, 워싱턴에 도착한 두 사람은 셔먼 독점금지법 적용은 일단 접어두고, 10시 시장이 열리기 전에 이 대형 인수를 인정해 달라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백악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루즈벨트의 비서는 대통령은 10시 이전에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다고 면회를 거절해 왔다. 이때 프릭과 게리는 그 자리에 마침 있던 내무부 장관 제임스 루돌프 가필드에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을 하면서 가필드가 대통령에게 직접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하면서 10시 이전에 면회가 허용되었다. 시장이 열릴 때까지 한 시간도 채 남아 있지 않았지만, 루즈벨트 대통령과 국무부 장관 엘리후 루트가 회의에 참여했고, 인수 제안과 인수가 허용되지 않은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시장의 폭락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여부를 검토하였다.[205][206] 루즈벨트는 결국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그 회의를 다음과 같이 상기했다. “증시가 열리기 전까지 즉석에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뉴욕의 상황이 그러해서 급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매수를 반대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해서 누가 나를 정당하게 비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205] 그 소식이 뉴욕에 도달하자, 자신감이 치솟았다. 커머셜 앤 파이넌셜 크로니클은 ”이 거래에 의한 구제는 신속하고 철저하다“라고 논평했다.[207] 패닉의 최후 위기가 해결된 것이다.[208]

3. 4. 뉴욕 증권거래소 폐쇄 위기

1907년 10월 24일, 미 재무부와 록펠러의 자금 공급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은행과 신탁회사는 주식 거래를 위한 단기 자금 융통을 꺼렸다. 이로 인해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하자, 10월 24일 목요일 오후 1시 30분, 뉴욕 증권거래소 회장 랜섬 토마스는 모건의 사무실로 가서 증권 거래소를 조기 폐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건은 조기 폐장이 오히려 시장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188][189]

모건은 뉴욕의 각 은행장들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은행장들은 오후 2시가 지나서 도착했고, 모건은 10분 안에 2,500만 달러를 마련하지 않으면 최소 50개의 증권사가 영업 정지를 당할 것이라고 알렸다. 오후 2시 16분까지 14개 은행장이 거래소 폐쇄를 막기 위해 총 2,360만 달러를 마련했다. 현금은 2시 30분에 거래소로 옮겨졌고, 3시 정각 거래소 마감까지 1,900만 달러가 대출되면서 거래소 폐쇄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 모건은 평소 언론을 피했지만, 그날 밤 사무실을 떠나면서 기자들에게 "사람들이 은행에 돈을 맡겨도, 모든 것이 괜찮을 겁니다."라고 말했다.[190]

10월 25일 금요일, 거래소에는 "다음은 그 회사가 위험하다"는 등의 소문이 돌았고, 시장의 현금은 고갈되고 있었다. 모건은 다시 주요 은행장들과 회동을 갖고, 두 번째 자금 풀 구축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때 각 은행들은 기여를 꺼렸고, 결국 모인 자금은 970만 달러에 불과했다. 모건은 이 자금이 마진 콜(신용 판매)에 사용되지 않도록 조건을 걸었다. 금요일 거래소 전체 거래량은 목요일의 2/3 정도였지만, 모건이 만든 자금 풀로 자금 수요가 충족되면서, 파산하는 증권사 없이 간신히 마감할 수 있었다.[191]

3. 5. 신용 회복 노력과 뉴욕시 파산 위기

모건, 스틸먼, 베이커를 비롯한 뉴욕의 다른 은행장들은 무한정 자금을 모을 수 없었다. 심지어 미국 재무부조차도 충분한 자금을 보유하지 못했다. 은행가들은 일반 대중의 신뢰 회복이 필수적이며, 신뢰가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두 개의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하나는 성직자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위원회로, 일요일 예배에서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교회에 건의하는 활동을 하는 조직이었다. 다른 하나는 홍보위원회로, 구제 금융 지원을 언론에 설명하는 것이었다.[192] 다음 날(10월 26일) 토요일, 홍보위원회의 활동에 따라 일부 조간신문에서는 모건 등의 노력을 기리는 시간벌기 기사가 지면에 게재되었다. 또한 당시 유럽에서 가장 저명한 은행가였던 로스차일드 경도 모건에 대해 ‘흠모와 존경’하는 마음을 전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192] 신뢰를 회복하려는 시도로, 재무부 장관 코텔류는 워싱턴으로 복귀하면 최악의 상황은 지나갔다는 메시지를 월스트리트에 보내겠다고 동의했다.[193][194]

월요일 자금의 유동성을 보장하기 위해, 뉴욕 자금 결제기구(New York Clearing House)는 은행 간 현금을 해결하는데 교환할 수 있는 1억달러의 대출 증서를 발행하여, 예금자들에 대한 현금 유보금을 보류할 수 있게 허용하였다.[195] 이러한 것을 성직자들과 신문에서 홍보를 했으며, 현금으로 인한 은행 잔고의 방출로 그 월요일에 뉴욕에 질서가 잡혔다.[196]

월스트리트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새로운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10월 27일 일요일 저녁 모건의 파트너 조지 퍼킨스는 11월 1일까지 적어도 2000만달러의 자금을 준비하지 않으면, 파산할 것이라는 말을 뉴욕시에 알렸다. 시는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려 했지만 위기를 피하기에 충분한 금액을 모을 수 없었다. 10월 28일 월요일부터 다음 날 화요일에 걸쳐 시장, 시 간부들과 회의를 가진 J. P. 모건은 3000만달러 상당의 시 발행 채권을 매입하여 파산이라는 ‘참극’에서 뉴욕시를 구했다.[197][194]

3. 6. US 스틸의 TC&I 인수

JP 모건이 주도하여 설립한 철강 기업 US 스틸이 '테네시 석탄 철강 철도 회사'(TC&I)를 인수하여 급한 불을 끄게 되었다. 당시 반독점 자본을 배척해 온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매우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인수를 묵인했다. 그 이후로 경제는 다시 회복되어 성장을 이어갔다.[198]

1907년 11월 초, 대형 증권사 무어 앤 슐레이(''Moore & Schley'')가 TC&I 주식을 담보로 3000만 달러가 넘는 대규모 대출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불안정한 시장의 여파로 TC&I 주가가 폭락하면서 담보 가치가 하락했고, 금융 기업에 대한 뱅크런 등으로 유동성이 부족했던 시기에 대규모 마진콜을 당하면서 시장은 새로운 위기를 맞았다.

무어 앤 슐레이의 파산을 막기 위해 모건은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US 스틸이 TC&I 주식을 취득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US 스틸 이사회는 위기 상황에서 역할을 인식하고 TC&I 보통주를 담보로 500만 달러를 대출하거나, 주당 90달러에 주식을 취득하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199]

일요일 오후부터 저녁에 걸쳐 모건 등은 US 스틸과 TC&I 주식 거래에 대해 협의를 했고, 일요일 밤 US 스틸의 인수 계획이 결정되었지만, 반독점주의자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허가 여부가 문제였다.[204]

헨리 클레이 프릭과 앨버트 게리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백악관으로 향했고,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인수를 묵인했다.[205][206] 이 소식으로 시장의 신뢰가 회복되었고, "이 거래에 의한 구제는 신속하고 철저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공황의 마지막 위기가 해결되었다.[207][208]

4. 여파

1907년 공황은 전미경제연구소가 1907년 5월부터 1908년 6월까지로 추정한 불황 기간에 발생했다.[209][210] 이 공황으로 인해 금융 시장과 증시가 폭락하면서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이 가해졌다.

이듬해 존 록펠러 2세의 장인인 넬슨 W. 앨드리치 상원 의원은 〈앨드리치 브리랜드 법〉안을 초안했고, 이 법에 따라 1907년 공황을 조사하고 향후 위기 해결책을 제안하기 위한 국가 금융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는 연방준비제도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4. 1. 경제적 영향

1907년 공황은 전미경제연구소가 1907년 5월부터 1908년 6월까지로 추정한 불황 기간에 발생했다.[209][210] 금융 공황과 증시 폭락이라는 상호 연관된 경기 수축으로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산업 생산은 이전의 어떤 뱅크런 이후보다 더 감소했고, 당시 사상 두 번째로 많은 기업이 도산했다. 1907년 5월부터 1908년 6월 사이 총생산액은 5% 감소했고, 수출은 26% 감소했다. 실업률은 3% 이하에서 8%로 상승했으며, 1907년 120만 명이었던 이민자 수는 1909년 75만 명으로 줄었다.[211]

1907년 공황으로 석탄강철 생산량이 크게 감소했다.

품목1907년1908년감소율
석탄 생산량428.9 백만 톤371.3 백만 톤13.4%
강철 생산량23.36 백만 톤14.2 백만 톤40%



중공업 생산 제품의 저하율은 그 해까지 발생한 다른 위기보다 심각했다.[212]

남북 전쟁 이후, 미국은 다양한 공황을 경험했다. 경제학자 찰스 캘로미리스와 게리 고톤은 은행 영업 정지가 발생한 위기로 1873년 공황, 1893년 공황, 1907년 공황, 1914년 공황을 꼽는다. 1884년, 1890년, 1896년에도 경제 위기가 발생했지만, 1884년과 1890년 공황은 광범위한 영업 정지를 막았다. 1896년 금융 위기는 패닉으로 분류되기도 한다.[210]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위기가 빈번했기 때문에, 1907년 금융 위기에서 J. P. 모건의 역할이 두드러진 반면 우려도 낳았다.[213] 금융 관계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도 금융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를 냈다.[214] 1908년 5월, 앨드리치 브리랜드 법이 의회를 통과했고, 공황을 조사하고 금융업 규제 법안을 제안하기 위해 국가통화위원회가 설립되었다.

4. 2. 푸조 위원회

하원 은행 및 통화 위원회 위원장인 아르센 푸조 (민주당–루이지애나 제7선거구) 의원은 "머니 트러스트(money trust)" 즉, 모건과 뉴욕의 다른 가장 강력한 은행가들의 사실상의 독점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 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위원회는 은행 거래에 대한 통렬한 보고서를 발표했고, J. P. 모건 & Co. 임원들이 시가총액 225억달러에 달하는 112개 기업의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뉴욕 증권 거래소의 총 시가총액은 265억달러로 추산되었다).[75]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J. P. 모건은 푸조 위원회에 출석하여 새뮤얼 언터마이어(Samuel Untermyer)로부터 수일간 질문을 받았다. 언터마이어와 모건의 유명한 설전, 즉 은행업의 근본적으로 심리적인 성격, 즉 신뢰에 기반한 산업이라는 점에 대한 설전은 종종 비즈니스 기사에서 인용된다.[76][77]



:'''언터마이어:''' 상업 신용은 주로 돈이나 재산에 기반하지 않습니까?

:'''모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입니다.

:'''언터마이어:''' 돈이나 재산보다 먼저입니까?

:'''모건:''' 돈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제가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든 채권을 가지고 와도 저에게서 돈을 얻을 수 없습니다.[76]



모건의 동료들은 그의 계속되는 쇠약을 청문회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2월에 병이 들었고 1913년 3월 31일 사망했는데, 연방준비제도가 "머니 트러스트"를 최후의 대부로서 공식적으로 대체하기 9개월 전이었다.[76]

J. P. 모건(J. P. Morgan)이 은행들을 장악하는 모습을 그린 만화

4. 3. 연방준비제도 설립

1907년 공황의 여파로, 미국에는 통화 공급량을 관리하는 중앙은행이 없어 경제가 취약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1906년 1월, 쿤 로브 컴퍼니의 사장 제이컵 시프는 "만약 미국에 신용 기관들을 적절하게 통제하는 중앙은행을 없다면, 우리나라는 조만간 역사상 가장 심각한 금융 위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215]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10년 11월, 넬슨 W. 앨드리치 상원의원은 조지아 해안의 지킬 섬에 있는 '지킬 섬 클럽'에서 금융 정책과 제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비밀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앨드리치 외에 에이브러햄 피아트 앤드류(연방 재무부 차관), 폴 워버그(쿤 로브 컴퍼니 대표), 프랭크 밴드립(내셔널 시티 은행장), 헨리 데이비슨(J. P. 모건 컴퍼니 파트너), 찰스 노턴 (J. P. 모건 소유의 뉴욕 퍼스트 내셔널 은행장), 벤자민 스트롱(벙커 신탁 사장) 등이 참석하여 '국가준비은행'(''National Reserve Bank'') 구상을 내놓았다.[216]

국가 금융위원회의 최종 보고서는 1911년 1월 11일에 발표되었고, 2년간의 논의 끝에 1913년 12월 23일 의회는 로버트 오웬과 카터 글래스가 제출한 오웬 글래스 법안을 가결하였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즉시 이 법에 서명하여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를 당일 설립했다.[217] 초대 의장은 찰스 햄린이 취임하였고, 12개 은행의 연방 준비 은행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은행인 뉴욕 연방 준비 은행(Federal Reserve Bank of New York) 총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ederal Open Market Committee) 부위원장을 역임하였고, 모건의 심복이었던 벤자민 스트롱이 임명되었다.[217]

J. P. 모건은 공황을 잘 대처하여 일시적으로 영웅으로 비춰졌지만, 금권 정치와 부의 집중으로 인해 곧 비판을 받았다. 모건의 은행은 위기에서 살아남았지만, 신탁회사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때문에 일부 분석가들은 이 위기가 은행의 이익을 위해 기획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218][219] 또 다른 사람들은 모건이 위기를 이용하여 US 스틸이 TC & I를 획득하게 했다고 믿었다.[220]

하원 통화 금융위원회의 위원장 아르센 푸조 하원 의원은 '금융 트러스트'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소집했다. 푸조 위원회(Pujo Committee)의 보고서에 따르면 JP 모건 컴퍼니의 간부가 112개 기업의 이사로 취임하고 있었고, 그 기업의 자본 총액은 225억 달러였다.(당시 뉴욕 증권 거래소 상장 기업의 자본 총액은 265억 달러였다.)[223]

1912년 12월, 푸조 청문회에서 증언한 J. P. 모건은 수석 조사관 새뮤얼 언터미어와 신용에 대한 유명한 공방을 벌였다.[224][225]

:'''언터미어''': 신용 거래는 주로 돈과 재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요?

:'''모건''':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인품입니다.

:'''언터미어''': 돈이나 재산보다?

:'''모건''': 돈보다 무엇보다 우선이죠. 돈은 인품을 살 수 없고... (중략) 내가 신뢰하지 못하는 인간은 기독교 세계에 존재하는 어떠한 채권을 가지고도 내게서 돈을 얻어낼 수 없었습니다.[224]

모건은 1913년 3월 31일에 사망했으며, '금융 트러스트'는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로 발족하기 9개월 전이었다.[224]

5. 한국에 주는 교훈

모건은 1907년 공황에 대처하여 한때 칭찬을 받았으나, 금권주의적 체질과 축적된 부에 대한 불안감으로 그 명성은 곧 사라졌다. 모건의 은행은 공황을 극복했지만, 신탁회사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때문에 이 공황은 신탁회사의 신뢰를 실추시키기 위해 은행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는 연구자도 있었다.[162][163] 모건이 위기를 이용해 US스틸(US Steel)에 TC&I를 획득하게 했다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164] 모건 자신도 공황으로 2100만달러를 잃었지만, 위기 확산을 막았다. 모건이 수행한 역할의 중요성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지만, 엄격한 조사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47][165][166]

하원 통화은행위원회 위원장인 알세느 푸주(Arsene Pujo) 하원의원(민주당, 루이지애나주)은 “머니 트러스트”, 즉 모건과 그의 동료들에 의한 금융계 기업 연합(트러스트)을 조사하기 위한 공청회를 소집했다. 이 푸주 공청회(Pujo Committee) 보고서에 따르면, J.P. Morgan & Co.영어의 간부는 112개 기업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었고, 그 기업들의 자본금 총액은 225억달러였다(당시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기업의 자본금 총액은 265억달러였다).[167]

1912년 12월, 푸주 공청회에서 증언한 모건은 수석 수사관 Samuel Untermyer영어와 격렬한 설전을 벌였다. 언터마이어와 모건의 유명한 설전은 은행업의 기본적·심리적 본질, 즉 경제 활동은 신용에 기반한다는 본질을 건드린 것으로, 비즈니스 전문지 등에 자주 인용되곤 한다.[168][169]



'''언터마이어:''' 신용거래란 주로 돈이나 재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까?

'''모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품입니다.

'''언터마이어:''' 돈이나 재산보다요?

'''모건:''' 돈보다 무엇보다도. 돈으로 인품을 살 수는 없으니까요. (중략) '''내 신용을 얻지 못한 사람은, 기독교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채권을 가지고 있더라도, 나로부터 돈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168]



증언을 마친 후, 모건은 이집트 여행 중이던 1913년 2월 건강을 악화시켜 같은 해 3월 31일 사망했다.[170] 연방준비제도가 발족하기 9개월 전이었다.[168]

참조

[1] 뉴스 AMERICAN BANKS "IN THE JUNGLE". http://nla.gov.au/nl[...] 1933-03-16
[2] 웹사이트 The Role of Information Failures in the Financial Meltdown http://people.ischoo[...] 2009-04-08
[3] 웹사이트 What Prior Market Crashes Can Teach Us About Navigating the Current One https://www.mornings[...] 2020-06-25
[4] 웹사이트 Panic of 1907: J.P. Morgan Saves the Day http://www.u-s-histo[...]
[5] 웹사이트 Born of a Panic: Forming the Fed System http://minneapolisfe[...]
[6] 웹사이트 The Financial Panic of 1907: Running from History http://www.smithsoni[...] 2008-10-09
[7] 서적 1990
[8] 서적 2004
[9] 웹사이트 Paul Saffo, ABC News (April 17, 2008) http://saffo.com/wp-[...] 2008-04-17
[10] 서적 1990
[11] 서적 1909
[12] 서적 1907
[13] 서적 2007
[14] 서적 2007
[15] 서적 2005
[16] 서적 2007
[17] 서적 2007
[18] 서적 2007
[19] 서적 2007
[20] 서적 2007
[21] 서적 2007
[22] 서적 2007
[23] 서적 2007
[24] 서적 2007
[25] 서적 2007
[26] 서적 1990
[27] 웹사이트 Historic Pittsburg http://digital.libra[...]
[28] 서적 1992
[29] 서적 2007
[30] 서적 2007
[31] 뉴스 WHEN THE POUND SAVED THE DOLLAR. http://nla.gov.au/nl[...] 1931-12-08
[32] 서적 2007
[33] 서적 2007
[34] 서적 2007
[35] 서적 1990
[36] 논문
[37] 논문
[38] 논문
[39] 논문
[40] 논문
[41] 논문
[42] 논문
[43] 논문
[44] 논문
[45] 논문
[46] 논문
[47] 논문
[48] 논문
[49] 논문
[50] 논문
[51] 논문
[52] 논문
[53] 논문
[54] 논문
[55] 논문
[56] 논문
[57] 논문
[58] 논문
[59] 논문
[60] 논문
[61] 웹사이트 US Business Cycle Expansions and Contractions https://www.nber.org[...] 2008-09-22
[62] 논문
[63] 논문
[64] 논문
[65] 논문
[66] 논문 Chapter 1: The Early 1910s: Post-Panic Creature and Party Posturings
[67] 웹사이트 1908 Photo: Frank A. Vanderlip leads a U.S. business delegation to Japan to meet with Japanese business leaders including Shibusawa Eiichi and representatives of Mitsui & Co. for their assistance in resolving The Panic of 1907 and the unstable U.S. Stock Market. https://theemperoran[...] 2020-00-00
[68] 논문
[69] 논문
[70] 논문
[71] 논문
[72] 논문
[73] 뉴스 Here's How It's Done, Hank: A Parable From a Crisis of a Century Ago https://www.washingt[...] The Washington Post 2008-09-28
[74] 논문
[75] 논문
[76] 논문
[77] 논문
[78] 문서 ニッカーボッカー信託会社は、1923年にアービング銀行(Irving Trust)に買収された。このアービング銀行は1989年バンク・オブ・ニューヨークに買収される。
[79] 문서 塩谷 (1971)
[80] 웹사이트 The Role of Information Failures in the Financial Meltdown http://people.ischoo[...] School of Information, UC Berkeley 2009-04-09
[81] 문서 塩谷 (1971)
[82] 문서 恐慌が起こるとイングランド銀行はドイツ帝国から大量に正金を購入した。
[83] 논문
[84] 문서 1980年代にマーティン・シーゲルをフィーチャー。彼はアイヴァン・ボウスキーとともにマイケル・ミルケンのドレクセル・バーナム・ランベール社からテイクオーバーの対象となる企業の財務情報を受け取っていた。
[85] 웹사이트 New York Life Insurance and Trust Company records, 1830-1878 (inclusive): A Finding Aid http://oasis.lib.har[...] Harvard University Library Online Archival Search Information System
[86] 서적 アメリカ私募証券市場の発展と構造 有斐閣
[87] 서적 多国籍企業の史的展開 植民地時代から1914年まで ミネルヴァ書房
[88] 논문
[89] 논문
[90] 웹사이트 HIghTech_Quake2 http://www.saffo.com[...] ABC News 2008-04-17
[91] 논문
[92] 논문
[93] 문서 全上場企業の株価指数。ブルナー&カー (2009)
[94] 문서 ブルナー&カー (2009)
[95] 논문
[96] 문서 ブルナー&カー (2009)
[97] 문서 ブルナー&カー (2009)
[98] 문서 ブルナー&カー (2009)
[99] 문서 ブルナー&カー (2009)
[100] 문서 ブルナー&カー (2009)
[101] 문서 ブルナー&カー (2009)
[102] 문서 ブルナー&カー (2009)
[103] 문서 ブルナー&カー (2009)
[104] 문서 ブルナー&カー (2009)
[105] 문서 ブルナー&カー (2009)
[106]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07]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08]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09] 논문
[110] 논문
[111]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12]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13]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14]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15]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16]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17]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18] 웹사이트 Union Trust Company, Providence http://www.ricurrenc[...] 2018-06-06
[119]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20]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21] 논문
[122] 서적 モルガン家
[123]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24] 문서 シティバンクの前身
[125]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26]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27] 논문
[128]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29] 논문
[130]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31]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32]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33]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34] 논문
[135] 논문
[136]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37]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38]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39]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40] 뉴스 May Join Moore & Schley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70-06-30
[141] 뉴스 S.E.C. Suspension Hits Dreyfus & Co. Along With Partner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70-07-28
[142]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43] 서적 Chernow (1990)
[144]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45]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46]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47] 서적 Chernow (1990)
[148]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49]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50]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51] 웹사이트 US Business Cycle Expansions and Contractions http://www.nber.org/[...] 2008-09-22
[152] 서적 Calomiris|Gorton (1992)
[153]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54] 서적 塩谷 (1971)
[155]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56] 서적 Smith (2004)
[157] 서적 Miron (1986)
[158]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59]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60] 서적 グリフィン (2005)
[161]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62] 서적 McNelis (1969)
[163] 서적 Chernow (1990)
[164] 서적 Chernow (1990)
[165] 뉴스 Here's How It's Done, Hank: A Parable From a Crisis of a Century Ago https://www.washingt[...] The Washington Post 2008-09-30
[166]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67]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68]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69] 서적 Chernow (1990)
[170] 서적 ブルナー&カー (2009)
[171] 뉴스 AMERICAN BANKS "IN THE JUNGLE". http://nla.gov.au/nl[...] The Advertiser (Adelaide, SA : 1931 - 1954) 2012-11-22
[172] 서적 塩谷 (1971)
[173] 서적 브루너&카 (2009)
[174] 서적 Bruner|Carr (2007)
[175] 서적 Bruner|Carr (2007)
[176] 논문
[177] 논문
[178] 논문
[179] 논문
[180] 웹사이트 Historic Pittsburg http://digital.libra[...]
[181] 논문
[182] 논문
[183] 논문
[184] 논문
[185] 논문
[186] 논문
[187] 논문
[188] 논문
[189] 논문
[190] 논문
[191] 논문
[192] 논문
[193] 논문
[194] 논문
[195] 논문
[196] 논문
[197] 논문
[198] 논문
[199] 논문
[200] 논문
[201] 논문
[202] 논문
[203] 논문
[204] 논문
[205] 논문
[206] 논문
[207] 논문
[208] 논문
[209] 웹사이트 US 비즈니스 사이클의 팽창과 수축 http://www.nber.org/[...] 전미경제연구소 2008-09-22
[210] 논문
[211] 논문 2007
[212] 논문 1971
[213] 논문 2004
[214] 논문 1986
[215] 논문 1908
[216] 논문 2007
[217] 논문 2007
[218] 논문 1969
[219] 논문 1990
[220] 논문 1990
[221] 뉴스 Here's How It's Done, Hank: A Parable From a Crisis of a Century Ago http://www.washingto[...] 워싱턴 포스트 2008-09-28
[222] 논문 2007
[223] 논문 2007
[224] 논문 2007
[225] 논문 1990
[226] 서적 The_Moneychangers http://www.goodread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